12. 네비우스 선교정책 :
1884년부터 1930까지 교인의 숫자가 엄청나게 증가했는데 이렇게 급성장하게 된 요인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한국교회와 네비우스 선교정책에서 관안련 선교사는 한국교회의 성장요인들을 여러 가지 열거하고 있다. 한국 전통종교들이 한국교회의 성장을 촉진시켰다는 점, 한국인의 유순성, 리더쉽에 잘 따르는 한국인의 국민성, 평안함에 대한 한국인의 갈구, 국왕의 호의, 여성의 지위향상, 한국인의 애국심, 참되고 신비한 종교에 대한 한국인의 갈망, 서양교육, 높은 문자 해독률, 시대적인 상황, 그리고 한국인의 종교 심성등을 들수 있다.
한국교회의 가장 큰 성장의 요인은 역시 1890년에 채택한 네비우스 선교정책 때문이라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지금까지 네비우스 선교정책의 핵심은 자립, 자치, 자전이라고 알려져 왔다. 그러나 그 핵심은 성경공부에 있었다.
네비우스 선교정책의 10가지는 다음과 같다. ① 선교사들이 개인적으로 순회전도한다. ② 모든 선교사역에서 성경이 중심이 되게 한다. ③ 한국인 스스로가 전도하게 한다. ④ 한국인 스스로가 교회를 치리한다. ⑤ 경제적으로 한국인 스스로에 의해서 자립한다. ⑥ 모든 신자는 그룹의 영수와 순회조사 아래서 조직적으로 성경공부 한다. ⑦ 성경적인 권징을 엄격히 실시한다. ⑧ 다른 선교 단체들과 연합하고 협력한다. ⑨ 법정소송 사건이나 그와 유사한 문제는 간섭하지 않는다. ⑩ 가능한 민중의 경제문제에 도움을 준다. 이 열가지 선교정책을 요약한다면 성경중심의 선교정책과 정교분리의 철저한 실시 두가지로 나눌수 있다. 또한 네빈우스 선교정책은 교회의 성장외에도 엄격한 주일성수, 교리주의 신앙, 반자유주의 신앙관을 한국교회에 뿌리내려 주었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이런 네비우스 정책은 사회적인 책임을 간과하는 부정적인 면도 만들게 되었다.
13. 1907년 부흥운동과 영계 길선주 :
길선주는 막힘없이 줄줄 암송하는 성경귀절 , 선교사들에 대한 가차없는 비판, 무엇보다도 주권상실의 울분을 신앙으로 스스럼없이 승화시키는 탁월한 리더쉽, 이 모두는 길선주를 명실상부 한국교회의 지도자로 만들어 주기에 충분했다. 그는 1907년 한국 최초의 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은 최초의 일곱명의 장로교 목사 가운데 한 사람이다. 평양 장대현 교회를 무려 20년간 담임했고, 1907년 평양부흥운동의 불꽃을 점화, 확신시킨 대각성 운동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그는 2만번 이상 설교를 했고 3백 80만명 이상이 그의 설교를 들었으며, 3000명 이상이 그에게서 세례를 받았고, 무려 60개의 교회를 설립했던 한국 개신교의 살아있는 증인이었다. 길선주는 평서노회 사경회 마지막 새벽기도를 인도하다. 1935년 11월 18일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14. 춘원 이광수의 기독교 비판 :
초창기 한국의 지성인 중 춘원 이광수 만큼 관심을 가지고 민족계몽이라는 측면에서 기독교를 관찰한 인물은 없을 것이다. 춘원은 기독교야 말로 " 금일 조선 사상계에 가장 조직적이요, 위대한 세력을 가진자며 , 실로 암흑하던 조선에 신문명의 서광을 전하여 준 최초의 은인이며 겸하여 최대의 은인이라고 예찬을 서슴없이 토로한 적이 있다. 그러던 그가 5개월후 같은 잡지에서 야소교회의 결점을 강도높게 비판하기 시작했다. 조선교회는 계급적이고 교회지상주의적이며, 교역자가 무식하고 미신적이라는 4가지 결점을 지적했다. 이중에서 그가 현금 조선교회가 지니고 있는 가장 큰 문제점으로 지적한 것은 교회지상주의였다. 춘원의 이러한 비판은 일찍이 종교개혁자 마틴루터나 존칼빈이 외쳤던 개혁사상과 맥을 같이하고 있다. 춘원의 기독교 비판의 핵심은 한마디로 교회와 세상을 이원론적으로 구분해서는 안됨에도 불구하고 교회가 사회적인 책임을 간과하고 자신들의 신앙을 내향화시켜 자기들만 천국가고 잘 살겠다는 개인주의 신앙을 태동시키고 말았다는 것이다.
이와같은 한 지성인의 기독교 비판은 몇가지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첫째는 기독교를 비판했던 장본인이 한국의 지성인을 대표하는 인물이었다는 점이다. 둘째 그의 비판이 근거가 전혀 없지 않다는 사실이다. 셋째, 기독교에 대하여 긍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던 지금까지의 태도와는 달리 기독교를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이들이 생겨났음을 반영하여 주는 사건이라는 점에서 한가지의 의의를 찾을수 있다.
15. 김장호 자유주의 논쟁 :
1910년 일제의 강요에 의해 한일합방이 체결되고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기까지 한국교회는 그야말로 격변의 시대였다. 한일합방이라는 민족적 슬픔속에서도 1912년 장로교 총회가 조직되고 1916과 1918년에 신학세계와 신학지남을 창간되고 1919년에 3.1운동이 일어남으로써 한국교회는 선교사반세기 만에 비로서 민족적으로나 신학적으로 독립의 틀을 형성하는 듯 했다. 한일합방후에 발생한 105인 사건과 얼마후에 발생한 김장호 자유주의 사건으로 한국개신교는 한차례의 위기를 맞았다. 현대주의를 외친 김장호목사가 당대 보수주의 신학의 요람 평양신학교 출신인데다. 그가 소속한 노회가 가장 일찍 개신교를 받아들이고 가장 역사가 깊은 황해노회였다는 사실 때문이다
김장호는 신원교회를 사임하고 사리원 남쪽에 있는 홍수원 역전의 홍수원 교회를 담임하고부터 자신의 자유주의 사상을 피력하기 시작했다. 외국에 유학하지 못한 김장호가 현대주의와 진화론의 사상과 일치된 현대사상을 접할수 있었던 것은 그가 소속된 황해지역의 공위량 선교사에 의해서이다. 김장호는 다년간 공위량 선교사 밑에서 조사로 있으면서 자연스럽게 공위량 선교사로부터 진화론, 성경의 고등비평을 비롯한 현대 자유주의 사상에 영향을 받았다.
김장호는 단순히 현대주의 사상의 영향을 받은 것 그 이상이었다. 그는 전투적으로 그런 현대사상을 한국교회에 가르치고 확신시키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노회로부터 강력한 비판을 받은 김장호는 1818년 12월 6일 황해노회로부터 이단자로 낙인되 면직당하고 제명되기 전 반선교사의 기치를 내걸며 민족주의자적 조선 기독교를 표방하며 소위 조선 기독교회를 설립하고 만주 길림에 교단 신학교,길림 신학교를 설립하였다. 그러나 반서구 반선교사의 기치를 내걸고 민족적 기독교를 주창했던 조선 기독교가 처음으로 친일적인 색깔로 가득찼다는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이며 하나의 비극이었다.
16. 자유주의 노선 :
1930년대는 한마디로 새로운 신학이 역사에 등장하는 종교적 다원화시대였다. 한국교회는 자신들의 신학을 정립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나면서 신학적 방향이 몇가지로 뚜렷이 대표되어 진행되기 시작했다. 박형룡 박사를 통해서 소위 정통주의가, 김재준 목사를 통하여 소위 진보주의가 , 정경옥 교수를 통해서 자유주의가 뿌리를 내리게 된다.
한국의 자유주의 문제는 미국의 자유주의 논쟁의 축소판이었다. 1920년대는 미국에서 소위 근본주의 대 현대주의 논쟁이 정점에 달한 시대였다. 논쟁이 한창 진행되고 있던 1923년 구 프린스턴 신학자 그레샴 메이첸이 자유주의를 논박하는 기독교와 자유주의를 저술했다. 이 책에서 메이첸 박사는 로마 카톨릭이 기독교의 변형인지 몰라도 자유주의는 다른 전제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기독교가 아니라며 신랄하게 비판했다. 이에 대해 자유주의자들은 어반선언으로 응징했다.
소위 북장로교 선교사중 유니온 출신의 선교사와 감리교 선교사들이 자유주의 원천이었다. 전통종교와 기독교를 조화시키려는 사람도 있었는데 그 사람이 최병헌이다. 그는 좀더 넓은 감리교 신학을 형성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러나 감리교 신학을 좀더 자유주의 방향으로 확장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정경옥이었다.
1930년대에 들어서면서 외국에 유학을 갔다 돌아온 한국의 젊은이들이 서구나 일본의 진보적인 신학을 소개하는등 한국인에 의해 좀더 본격적으로 확신되어 갔던 것이다. 대표적인 인물들은 역시 송창근, 채필근, 김재준등이다. 이들을 통해 한국의 진보주의 사상은 뿌리를 내리고 그 동기를 제공한 사람은 남궁혁 박사이다.
지금까지의 연구결과를 몇가지로 압축시킬수 있을 것같다. 첫째 자유주의 사상이 1930년대에 발흥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그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한국선교 초창기부터 한국에는 자유주의의 세력들이 등장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두 번째로 소위 총회가 자유주의 도전을 교권을 이용해서 압도했으나 자유주의 새력이 완전히 영향력을 상실했거나 사라진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세 번째, 박형룡 박사가 한국의 보수주의를 대변하는 인물로 부상했듯이 김재준 교수 역시 진보주의를 대변하는 인물로 그리고 정경옥교수는 좀 더 개방적이고 현대적인 자유주의자로 자리를 굳히게 되었다. 그리하여 1930년대 한국 기독교에는 박형룡 박사의 보수주의, 김재준 박사의 진보주의, 정경옥 교수의 자유주의가 하나의 맥을 형성하기 시작하였다.
17. 신학지남 논쟁 :
1930년대 신학논쟁이 한국교회에 발생했을 때 그 논쟁의 점화시킨 신학지가 신학지남이었다. 신학지남은 1918년에 창간된 장로교의 평양신학교에서 발행하는 신학잡지로 1916년에 창간된 감리교의 신학세계, 1922년에 출간된 성결교의 활천지와 더불어 한국교회의 신학을 대변하는 신학지였다. 신학지남은 교단내 목회자들에게 신학기본지식, 설교, 강해주석,을 제공하여 현장목회를 돕고 이름 그대로 신학적 방향을 지도하자는데 발행목적이 있었다.
처음 10년간 서양 선교사들이 맡아오던 편집을 1928년 정월부터 평양신학교 교수, 한국인 남궁혁 목사가 맡으면서 신학지남에 변화가 시작되었다. 그는 신학적 입장을 달리하는 사람에게 대단히 관용적인 사람이었다. 그는 일본과 미국에서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송창근, 김재준, 채필근 세사람의 글을 신학지남 특별기고자로 끌어들여 개재하였다.
김재준은 평양 숭인상업학교의 성경교사로 있으면서 신학지남에 정기적으로 기고하기 시작하였고 ,자각, 정돈, 건설이라는 1935년 1월 권두언에서 마침내 문제를 제기하였다. 채필근은 비교종교학에 관한 글을 여러 편 게재되어 신학지남의 폭을 넓혔다. 채필근은 기독교와 타종교의 차이를 강조하고 여전히 비교종교학적 접근을 하였다. 그러면서 자기의 입장을 나타내지 않고 숨겨오던 채필근은 노골적으로 한국교회의 신학이 너무 극단적인 방향으로 흐르고 정통을 기준으로 진보적인 이들에 대해 비판을 가하는 교단의 행위가 신앙인으로서 바람직하지 않다고 교계를 향한 비판의 화살을 가했다. 한국정통주의자들은 후대 데이비드 비일이 비교종교학이 독일로부터의 고등비평과 찰스다윈의 진화론과 더불어 미국의 현대주의를 태동시킨 주된 요인이라고 지적했던 것을 이미 반세기 전에 간파하고 있었다.
송창근은 기독교 윤리문제라는 제목으로 신학지남에 기고하였다. 그가 볼 때 조선교회의 가장 큰 문제는 윤리문제였다. 그는 한교회의 교인에 대한 불만에서 시작하여 목회자 전체, 더나아가 조선교회 전체를 향한 비판으로 확대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송창근의 비판은 단순한 비판의 성격을 넘어 교계에 대한 정면도전이었다. 한국교회의 정통주의를 가리켜 "위선자요, 형식주의자요 , 이십세기 바리새교인"이라고 비판한 것이다.
이들의 글에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일찍부터 예리하게 간파한 사람은 박형룡 박사였다. 신학지남의 신학적 변천을 처음부터 목도한 박형룡은 반현대주의 변증적인 논문들을 발표했던 것이다. 현대주의대 근본주의 논쟁을 피부로 체험한 그는 미국에서 일고 있는 신학논쟁, 현대주의자들의 전투적인 도전 앞에 정통주의 신앙을 변호해야 할 의무를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1930년대 들어서면서 표면화된 신학논쟁, 특별히 신학지남을 중심으로 벌어진 논쟁은 우리에게 적지않은 교훈을 제시해 준다. 가장 먼저 지적하고 싶은 것은 어디에서 신학교육을 받았느냐에 따라 신학적인 입장이 달라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그 다음 1930년대 진보주의 진영이나 정통주의 진영이나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모두 전투적인 성향을 띠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지난 2000년의 기독교 역사를 돌이켜 보면 신앙의 순수성을 외치는 이들은 분리주의로 흐르기 쉬웠고, 반면 신앙의 포용을 외치며 신학적 관용을 주창한 이들은 자유주의로 흘러왔던 것이 일반적인 추세이다. 신앙의 순수성을 유지하면서도 편협하지 않고 사회적인 책임을 다할수 있는 기독교 공동체 , 그것이 우리가 추구해야할 과제인 것이다.
18. 아빙돈 단권 주석 논쟁 :
아빙돈 단권주석의 출판은 한국교회에 적지않는 충격을 가져다 주었다. 감리교에서는 대단한 환영이었지만 장로교에서는 교단적인 차원에서 그 주석을 장로교 내의 목회자들은 절대 구매하지 말 것을 결정하였고, 그 주석의 번역에 참여한 장로교 목회자들이 총회에서 문제시되어 아빙돈 단권주석의 파장은 한국교회 전체에까지 미치게 되었던 것이다.
왜 이주석이 논쟁거리가 되었는가라고 의문을 제기할 사람이 있을 것 같아 먼저 그 이유를 밝혀두는 것이 필요하다. 선교 50주년이 되도록 사실, 한국인들에 의해 기술된 주석은 고사하고 번역주석하나 없었다. 이런 국내의 현실을 잘 알고 감리교에서 선교 50주년을 맞아 감리교 유형기 목사가 책임하에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미국 아빙돈 출판사에서 출판한 단권주석을 번역하여 출판하였던 것이다. 막상 출판하고 보니 주석의 신학적 입장이 지금까지 한국장로교회가 지켜오던 신학적인 방향과 너무 차이가 있다는 이야기가 돌았다. 거기에는 이미 벨하우젠의 문서비평, 궁겔의 구전, 알브라이트의 성서 고고학, 역사, 신학, 그리고 전승사 등이 채용되어 있었다. 이것으로 아빙돈 성경의 신학적 입장은 분명해 졌다. 성경이 영감으로 기록된 오류없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구 프린스톤의 입장을 떠나 성경이 오류가 있지만 권위가 있다는 새로운 신학조류에 맞추어 기술된 주석인 것이다.
이문제가 1935년 제24회 대한예수교 장로회 총회에 정식안건으로 상정되었다. 채필근은 주석에 참여한 것에 대해 사과하고 다시는 집필하지 않을 것과 재판시 자신의 글을 빼겠다는 약속을 한 반면, 김재준, 송창근,한경직 세사람은 신학지남에 성명서를 내었다. 이 사과문은 신학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전혀 책임이 없으며, 이문제로 교계에 소란을 피워 미안하다는 것이다.
아빙돈 주석문제는 몇 년전까지만 해도 신학적인 면에서 동질감을 형성했던 장로교도 이제 서구의 신학적 조류의 변천에 따라 변천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이 논쟁은 결국 한국교회에 유익을 주는 결과를 가져다 주었다. 선교 희년을 맞아 한국교회의 신학이 선교사 중심에서 한국인에게로 전이되어 오면서 한국교회는 성숙하기 시작했다. 이제는 단순히 답습하는 신학이 아니라 우리의 것을 찾아 우리의 현실에 적용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장로교 총회가 표준 성경주석을 발간하기로 결정한 것도 그런 시대적 조류를 반영하는 것이었다. 총회차원에서 이것을 결의하고 박형룡 박사에게 그 책임을 맡겼다.
19. 창세기 저작 문제와 여권논쟁 :
전통적으로 모세 저작권을 인정해 오던 미국기독교가 19세기 말엽부터 독일로부터 일어난 성경고등비평의 영향을 받아 흔들리기 시작하면서 전통적인 보수적 입장에서 후퇴하면서 발생한 것이다. 선교 50주년을 맞는 1930년대 초에 한국 장로교에서도 창세기 저작권 부인 문제와 여권문제가 제기되어 총회적인 차원에서 두 문제를 다룬 적이 있다. 창세기가 모세의 저작이라는 것은 기독교 이 천년의 고백이었다. 김영주 목사는 창세기 저작에 관한 문제를 일으켰다. 그는 일본의 자유주의 신학교 관서신학교를 졸업하고 일년동안 평양신학교에서 신학 재교육을 받은 인물이었다. 김영주 목사보다 모세 저작권 부인문제보도 더 노골적으로 총회의 보수적인 입장에 이의를 제기한 사람이 김춘배 목사였다. 그는 급변하는 현시대 여성의 권리가 신장되고 있는 이 현시대에 교회도 여성들의 지위를 현실화시켜 주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이 두 문제는 총회적인 차원에서 다룰 정도로 심각한 도전이었다. 이 두 문제를 연구하기 위하여 1934년 제 23차 총회 때 연구위원회가 조직되어 조사하기에 이르렀다. 연구위원회는 모세 저작에 관해서 오경의 모세 저작권 부인은 성경의 권위를 심각하게 손상하는 것이며 오경의 모세 저작을 인정한 그리스도의 권위에 대한 일대도전이며, 오경이 모세의 저작이라는 사실은 너무도 명백한 진리라는 것이다. 여성안수의 문제도 바울의 말은 당대에만 진리가 아니라 시간을 넘어 영원한 진리라는 것이다. 만약 성경의 진리가 당대의 시대적 배경에 국한된 현상이라면 성경의 모든 진리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상대적인 진리에 불과하며 그런 변할 수 있는 진리는 성경의 권위를 치명적으로 손상시키는 행위라는 입장을 단호히 하였다.
이 사건은 현대 우리에게 적지 않는 교훈을 안겨다 주었다. 먼저 감리교와 장로교의 입장차이다. 또 하나는 총회가 두문제를 단호하게 결정함으로써 신학적인 입장을 확고하게 내렸지만 그것이 곧 이 두 문제에 있어서 장로교회 내에 통일성이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김영주 목사와 김춘배 목사가 자신의 주장을 번복한 것은 자신들의 신학적 잘못을 깨닫고 방향을 수정한 것이 아니라 총회의 압력으로 목사직이 면직될 위기에 처해 있었기 때문이다.
총회는 여권문제가 단순한 해석상의 문제가 아니라 성경관과 연계되었다는 사실을 제시함고 , 총회적인 차원에서 그 문제를 진정시키는데는 성공했지만 , 그렇다면 여성이 교회에서 어떻게 사역을 해야 하고, 교회가 이 문제에 대해 어떤 방향에서 지도해야 할것인지에 대한 대안은 제시하지 못했다. 이것이 교파나 교단이 해야 할 몫이다.
20. 적극신앙단 논쟁 :
적극 신앙단 논쟁은 1930년대초 당시 Y.M.C.A 총무로 있던 신흥우를 중심으로 결성된 적극 신앙단이라는 단체와 관련되어 발생한 사건이다. 1883년 3월 충북 청원군에서 출생한 신흥우는 일찍이 배재학당에 다니면서 신학문에 눈을 뜨고 진보적인 입장을 취해왔다. 1927년 신흥우가 Y.M.C.A 총무직에 있으면서 기독교 연구회라는 반선교사, 반보수주의의 기치를 내건 새로운 운동을 전개했던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기독교 연구회는 선교사가 주도하는 조선 기독교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하고 순수하게 조선 사람들이 주도하는 조선 기독교 설립을 추구하였다.
조선적 기독교를 표방하는 신흥우가 자신의 이상을 좀더 구체화시킬 수 있었던 것은 1928년 예루살렘 선교대회였다. 이 대회의 한국대표로 참석하여 기독교의 토착화에 대한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의 마음은 토착화로 불붙기 시작하였다. 그가 외친 토착화란 탈선교사, 탈보수주의, 탈서구화, 탈전통이었다. 그러나 예루살렘에서 내건 토착화란 복음을 본질을 떠난 토착화가 아니라 복음의 본질을 변형시키지 않으면서 어떻게 효과적으로 사람들에게 복음을 증거할수 있을 것인가 하는 선교방법에 대한 토착화였다. 신흥우가 외친 토착화 개념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그는 5개의 적극신앙단의 선언를 하였으나 삶의 부도덕(여자와 문제)과 독선으로 감리교부터 1934년 가입불가와 교직자 가입금의 방침이 내려졌고 장로교에서는 1935년 평신고 가입금지 권고와 위험한 단체로 규정되어 인정받지 못하고 배척 당하였다. 또한 적극신앙단은 조선적 기독교와 반선교사의 기치를 내걸었지만 친일파화된 단체로 변질되고 말았다. 기독교의 토착화를 내건 민족주의적 조선 기독교는 없어지고 신사참배의 강요에 동참하는 친일파가 되어버린 것이다. 장로교 선교회의 지도자들이 미션스쿨을 폐교하면서까지 신사참배를 강요하는 일본 제국주의에 단연히 맞섰던 것과는 너무나 대조적이다. 역사는 그래서 흥미있는 것이다.
21. 김재준의 신학사상 :
한인간의 사상을 평가하는 작업은 그리 단순하지 않다. 영향이 깊게 드러워진 인물이라면 더욱 그렇다. 교단적으로 장로교 목사였던 김재준의 사상과 생애는 자연히 장로교사에서 박형룡 만큼이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김재준 역시 보는 시각에 따라 예찬과 비판을 동시에 받았다. 김재준은 신학을 하면서 신학을 학문적인 측면에서 접근하기 보다는 인간적인 측면에서 먼저 정립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을 하였다. 이런 김재준의 사상은 현대적인 표현을 빌리면 개방적인 사고방식이었고, 개방적인 사고는 김재준으로 하여금 어떤 특정 신학서적에 관심을 집중하지 않고 다양한 신학서적들은 섭렵하도록 자극을 주었다. 김재준이 공부하고 있던 시절의 일본과 그가 재학하고 있던 청산학원은 상당히 진보주의적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이곳에서 신학하는 동안 그는 자유주의 신학에 대해서 어느 정도의 식견을 가질수있게 되었다. 미국으로 다시 공부하며 미국4년간 그는 일본에서의 자유주의를 중화시키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그래서 청산학원의 급진주의가 프린스턴과 웨스턴을 거치면서 진보주의 혹은 자유주의적 보수주의로 전향되었던 것이다.
김재준의 사상의 원동력은 부분적으로 청산에서 받은 진보적이고 개방적인 인생관과 귀국후 소선지서를 탐독하면서 체득한 예언자적 의식에서 발원하였다. 그의 사상은 역사의 주인공으로서의 인식이다. 이런 인식은 그를 반선교사상과 반정통주의 , 신학교의 설립과 교육, 그리고 세계조류의 합류라는 세가지 방향으로 이끌었다. 김재준의 예언자적 외침은 반선교사상으로 표출되었다. 김재준은 선교사의 신학사상이 한국교회를 지배하고 있는 것에 대해 몹시 못마땅했다. 김재준은 프린스톤 출신들과 맥코믹 출신 선교사들이 장로교를 주도하면서 한국교회를 지나치게 보수적인 교회로 만들어 벼렸다고 보았다.
신학지남 사건으로 김재준은 평양을 떠나 간도 용정 진흥중학교로 자리를 옮겼다. 김재준이 평양을 떠날 쯔음 한국의 국내 교계는 신사참배의 문제로 어려움을 당하게 되었다. 이 문제로 해외 선교부는 한국의 선교지 철수를 결정하기에 이르렀고 한국의 보수주의 산실 평양 신학교는 폐교되었다. 신학지남도 폐간되었다. 보수적인 선교사들과 한국인들이 한국을 떠남으로 한국은 신학교 부재와 보수주의 지도력의 부재상태가 되었다. 이런 보수주의 지도력의 공백상태에서 일본에서 교육을 받은 김재준, 채필근, 송창근은 김대현 장로의 거액의 희사금으로 조선신학교를 설립하였다. 1930년대 교권적으로는 몰렸던 김재준이 결과적으로 전국적인 지지를 얻었고 자신이 개방과 진보주의 이상이 승리했다고 생각하였다.
그의 신학은 단순히 학문의 영역 그 이상이어야 한다고 보았다. 이런 김재준의 사상은 철학적으로 실존주의 철학에 신학적으로는 실존주의 신학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김재준과 이들 사상가들과의 연계성은 이들 모두가 그리스도 중심의 신학을 생명으로 하고 있다는 점이다.
박형룡이 서투른 자신의 작업을 추구하기보다는 완성된 서구의 신학사상을 소개하는 것을 철학으로 삼았다면 , 김재준은 완성된 서구의 것보다는 서투르지만 자신의 신학세계를 만들러 가려고 노력했던 인물이다. 그 결과 김재준은 박형룡의 정통주의나 정경옥의 자유주의와 대비되는 진보주의 사조를 한국교회레 뿌리내리는 역사의 주체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22. 정경옥의 신학사상 :
송길섭 교수는 정경옥을 가르켜 한국교회의 신학초기 자유주의 신학을 확립한 신학자라고 예찬하였다. 정경옥은 기독교의 역사적 경험을 존중하고 그리스도의 도덕적 인격성과 기독교의 도덕성을 강조하고 기독교인의 사회참여를 주창했다는 면에서 전형적인 감리교 신학자였다.
그는 게렛신학교에서 받은 신학교육은 정경옥의 신학사상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는 그의 스승의 영향을 받아 종교심리학과 종교신비주의에 특별한 관심을 가졌다. 정경옥은 경험론적 기독교를 추구하였고 체험의 신학자였다. 정경옥은 기독교가 인간이 갖고 있는 신앙체험의 역사적 표현이며 기독교 신학은 이런 종교적 경험들을 편견없이 실제적 가치를 찾는데 목적이 있다고 보았다. 정경옥은 당대의 장로교 신학교 교수들과 비교할 때 기독교를 비교종교학적 측면에서 접근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는 앞서 보았듯이 신비주의에 상당한 매력을 가졌다. 이런 신비주의에 대한 긍정적인 접근은 그의 경험론적 종교관의 뿌리를 형성하고 있었고 , 귀국후 형성된 감리교 신비주의 부흥운동은 그의 신비주의적이고 경험론적인 신앙관의 토양을 제공하였다.
정경옥의 신비주의 사상을 정의하면 종교적 신비주의는 이지, 감정, 직관, 의지 여하를 물론하고 사회전체로서나 혹은 개인의 자아의 인격적 총체로서 우주의 객관적 실재와 직접적 관계 즉 합일적 융합을 의식하며 이와 같은 합일의 경험에서는 인격이 근본가치와 우주의 절대목적을 이루고 지식의 객관적 확실성을 얻는다고 보는 종교사상이라 정의할 수 있다.
정경옥의 신학은 일관성이 있다. 경험론적 신학체계를 가지고 있다는 점과 신비주의적이 하나님과의 교통, 현대신학자 중에서는 바르트보다는 슐라이어마허나 리츌의 노선에 서 있었다는 점, 그리고 기독교 사상의 전통에서는 라틴의 전통에서보다는 알렉산드리아의 전통에 자신을 위치시키고 있었다는 점에서 정경옥의 신학은 적어도 일관성이 있었다.
그는 또한 온건한 현대주의자였다. 현대주의란 결국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종교경험에 기초하여야 할 것 "을 주장하는 것이라고 함으로써 자신이 오랫동안 주장하는 바 기독교는 체험의 종교라는 명제를 정당시하고 있다. 그가 현대주의에 상당히 긍정하고 있지만 정경옥은 오늘날의 극단적인 현대주의자들과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음을 분명하다. 그는 친히 잣니을 현대주의 맥락속에 분류하고 있으면서도 현대주의가 갖고 있는 문제점 즉 1)인간의 이성과 직관인 양심을 너무 과대평가하는 점 2)경험일반을 종교화함으로써 종교행동을 혼동한점 3)역사적 기독교의 특수성을 망각하고 기독교의 절대성을 부인한 것 4)기독교의 구속적 요소를 제거하려는 경향을 조심스럽게 경계하고 있다.
감리교 신학자들은 정경옥의 신학사상을 택하였고 현대자유주의의 급진적인 특징을 간과하고 말았다. 그 결과 감리교 신학교는 서구와 같은 현대주의의 길을 그대로 걸을 수 밖에 없었고 더 나아가 전통적인 기독교를 평가절하시키는 종교다원주의와 민중신학이라는 급진적인 노선을 신학적 이데올로기로 택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