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교회사(韓國 敎會史)
1. 서론 :
지난 2세기 동안 세계 사조, 특별히 기독교 사상은 역사상 유래를 찾아 볼 수 없는 격변의 변천 과정을 거쳐왔다. 서구는 찰스 다윈의 진화론이 역사에 등장하면서 종교를 시대적 역사적 산물로 보려는 움직임이 기독교계 일각에서 일어나 종교 진화론과 종교 사학파의 영향은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되기 시작하였다.
유럽 기독교 지성사의 변천이 19세기 중반부터 미국 기독교에 심각한 영향을 미치기 시작하였다. 전통적인 청교도 개혁주의가 지배하던 미국 기독교가 유럽으로부터 밀려오는 고등비평과 찰스 다윈의 진화론등 현대사조로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거의 같은 시기, 특히 19세기 후반 남북전쟁 이후부터 미국 사회는 농업중심의 사회에서 산업사회로 전환되면서 산업화로 인한 도시집중화 현상이 발생하고 그와 같은 전통적인 가치관이 일대 변혁을 맞기 시작하였다.
1870년부터 1925년까지의 기간동안 미국의 기독교는 전통적인 기독교를 고수하려는 공동체와 현대사조와 보조를 맞추려는 공동체로 뚜렷이 이분화되기 시작하였다. 전자를 가리켜 근본주의라고 칭하고 후자를 현대주의라고 부른다.
미국기독교 지성과 사회가 변혁을 맞던 19세기후반과 20세기 초엽 격변의 시대에 한국 선교는 시작되었다. 1884년 9월 20일 알렌이 입국하고 그 이듬해 4월 5일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입국하기 시작한 이래 1910년까지 한국에서는 수많은 다양한 개신교 선교사들이 입국하여 다양한 개신교 유산들을 한국교회에 남겨주었다.
한국 개신교 역사가 한 세기를 넘어선 오늘의 시점에서 한국교회사를 돌이켜 보았을 때 한국 개신교 역사의 사상적인 맥은 뚜렷이 1930년이전, 1930년부터 1960년까지 그리고 1960년이후부터 현재까지 세단계로 뚜렷이 대별해 볼 수 있다. 1930년 즉 1934년 한국개신교 회년을 맞는 그때까지 한국교회를 주도한 중심세력은 역시 선교사들이었고, 1930년 이후부터 한국개신교는 선교 1세대들이 선교지를 떠나서 외국에서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한국의 신학자들과 교계 지도자들이 한국교계를 이끌면서 한국개신교는 한국인들이 주도하는 교회로 리더쉽이 전환되었다.그리고 1950년대 일련의 분열을 맞았다. 6.25이후 사회 및 경제적 정치적 불안정이 한국교회에도 그대로 반영되면서 한국기독교는 신사참배, 성경관, 교권문제등의 문제로부터 분열하기 시작한 것이다. 1930년대 미국 교회가 안고 있는 똑 같은 분열현상이 한국교회에 그대로 반영된 것이다. 이 분열 특별히 1950년대에 장로교 안에서 발생한 분열은 전통적인 신학을 고수하려는 자들과 현대사조에 한국 기독교를 조정하려고 하는 공동체 사이에 벌어진 일련의 보수주의 대 진보주의 논쟁의 결과이다.
한국교회는 1960년이후 한국교회는 자신들의 나갈 방향을 진중하게 고민하면서 정체성을 정립하려는 움직임이 일기 시작했다. 교파를 막론하고 한국 교회의 지도자들 사이에는 자신들이 걸어온길 , 그리고 걷고 있는 길을 반추해 보면서 제 삼의 길을 모색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이 움직임은 대체로 전통적인 보수주의 신앙을 계승하려는 전통주의, 한국적 신학을 추구하려는 자유주의 토착화 신학, 그리고 이 시대에 새로운 모델을 제시하려는 복음주의 세가지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1960년대 이후 한국개신교는 교파를 초월해 토착화운동, 근본주의 운동, 복음주의 운동으로 대별되어 한국교회를 주도하기 시작하였다. 복음주의 공통체는 한편으로는 토착화 신학을 경계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극단으로 흐르는 근본주의자들을 동시에 경계하는 것이다. 복음주의 한편으로는 양 극단을 극복하려는 움직임, 영미에서 일고 있던 복음주의 운동의 영향 그리고 한국 복음주의 협회, 한국복음주의 신학회, 생명의 말씀사를 비롯한 초교파적 복음주의 출판사, 그리고 교파를 초월한 복음주의 교회의 성장으로 한국교회에 쉽게 정착할 수 있었다. 전통적인 신학을 양보하지 않으면서 사회적인 책임을 소홀히 하지 않는 교파를 초월한 복음주의 운동이 한국교회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2. 서양 문화와의 접촉 :
역사적인 기록을 통해 우리들에게 구체적으로 알려진 한국입국 서양인들로는 1627년 경주 앞바다에서 표류해 입국한 벨트브레(박연) , 1653년 제주두에 표착한 헨드릭 하멜, 1816년 군함을 이끌고 조선의 서해안을 탐사하기 위해 입국한 영국 해군 대령 머리 멕스웰과 바질 홀, 네덜란드 선교회의 파송을 받고 입국한 칼 구출라프 선교사, 그리고 로버트 토마스 선교사를 들수 있다.
벨트브레는 병자호란도 참전한 기록도 있으며, 자신과 같이 표류하다 조선에 입국한 하멜과 그 일행의 통역도 맡아보았다. 하멜은 제주도 앞바다에서 폭풍을 만나 표류하여 제주도에 도착했다. 그후 13년간 그는 조선에서 있었으며, 탈출후 표류기를 기술하여 조선을 세계에 널리 알렸다. 영국해군 대령 맥스웰과 홀은 1816년 군함을 이끌고 서해안에 입항해 해도를 작성하고 한문성경도 전해주었다.
칼 구출라프선교사는 상업이나 정치적이 목적으로 조선에 입국한 사람과는 달리 최초로 한국선교를 타진한 사람이다. 당시는 제국주의 정책의 붐을 타고 동양과의 통상확대를 통해 자국의 이익을 극대화시키면서 식민지 확보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이런 두가지 이유 즉, 상업과 선교의 목적으로 동양에 대한 유럽과 북미인들의 관심이 고조되었다.
구출라프는 서해인을 세차례 항해하며 주민을 만나 감자씨를 전해주었으며 또한 성경도 주었다. 로버트 토마스 선교사는 1866년에 제너랄 셔먼호를 타고 조선에 입국했다. 그는 황해도에서 한국어를 배우고 입국했으나 순교를 하였다.
3. 개신교 선교준비 :
c19세기 중엽 특히 1866년 제너럴 셔먼호 사건이 발생하고나서 한국 국내의 최대의 이슈는 개항이었다. 우리가 개항을 해야 하느냐 하지 말아야 하느냐하는 문제를 두고 개항을 반대하는 세력과 개항을 찬성하는 세력이 국내에서 끊임없이 논쟁과 세력 다툼을 벌여왔다. 개항을 반대했던 사람들을 위정척사파로 알려졌다. 이와는 달리 국제 질서에 합류하기 위해서는 문호를 열고 개화를 해야 한다고 외쳤던 사람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개화파로 알려졌다. 이 개화파는 크게 방법론을 두고 온건하게 개화를 추진하고자 하는 동도서기파와 급진적으로 개화하자고 하는 개화당 둘로 나뉜다.
위정척사파는 보수적인 민족주의 입장을 갖고 있었다. 이들이 갖고 있던 모토는 한국의 전통문화가 서구의 문화와 비교해서 결코 손색이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조선은 개항할 필요가 없고 , 개항을 하면 전통문화가 파괴되어 버린다라고 생각했다. 이들은 기독교를 위험한 종교로 보고 기독교를 배척하였다.
동도서기파는 온건한 개화를 주장했던 사람들이다. 이들이 모델로 삼은 것은 중국식 개화이다. 중국에서는 전통적인 문화를 계승 발전시키고 서구의 문물을 선별적으로 받아들이는 즉 온건한 개화를 추진한 결과 자신들이 고유한 전통을 상실하지 않으면서도 경제적인 여유를 갖는 국가가 되었다는 것이다.
급진 개화당은 일본을 모델로 하여 개화를 하자는 것이다. 일본이 명치유신을 모델로 철저한 개화를 추진하기 이해서는 먼저 봉건질서의 재편이 있어야 한다고 보았다. 봉건질서를 근본적으로 변혁시키고 빠른 시일 내에 서구의 기술문명을 우리가 받아들이고, 서구 문화의 근간이 된 기독교 마저도 주저할 것 없이 과감하게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만주에서의 개신교 준비에서는 이응찬을 비롯하여 네사람과 존로스 선교사는 한국선교를 위해서 성서번역을 착수하였다. 이 네명의 사람들은 성서번역을 위해서 성경을 읽고 한문성경을 한글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예수스리스도를 영접하고 1876년 로스의 동료 선교사 존매킨타이어 선교사로부터 세례를 받기에 이르렀다. 성경번역을 한후 이들은 전부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들에 의해서 국내의 복음전도가 시작되었다.
일본에서는 이수정에 의해서 복음이 준비가 되고 있었다. 율전 박사가 안천양이라는 일본 목사를 이수정에게 소개해 12월 크리스마스 때 처음으로 신앙생활을 시작하게되었고, 이수정은 1883년 4월 29일 일본에 건너간지 9개월만에 노월정 교회에서 미국선교사 존 낙스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이수정은 당시 일본주재 미국성서 공회 헨리 루미스선교사로부터 한글 성서번역을 의뢰받자 주저하지 않고 성경번역에 착수했으며 자신이 만나는 일본주재 미국선교사들에게 한국선교를 호소하였다.
이수정의 한국선교의 공헌은 감리교 선교사 매클레이 선교사의 요청을 받고 감리교 요리문답도 번역하여 1천부가 출판되어 국내에 널리 유포되어 한국선교의 효율을 높일수 있었다. 요코하마에서 그의 마가 복음성경 1천권이 출판되었다.
이상에서 얻을 수 있는 결론은 첫째 한국선교는 성서번역에서부터 출발했다는 것이다. 둘째, 한국인에 의해서 스스로 복음이 전파되었다는 점이다. 셋째, 한국인에 의해서 복음이 전파되었을 뿐만 아니라 교회가 한국인 스스로에 의해서 자립의 틀을 형성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4. 한국선교를 위한 준비 :
19세기 한국의 고위층 위정자들이 기독교를 반대했던 것은 기독교 자체가 아니라 기독교와 한국의 전통문화가 서로 대립적인 관계에 있다고 보고 그로 인해 한국의 전통문화를 파괴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라는 점이다. 그러나 조선의 고위 정치인들 중에는 천주교와는 달리 개신교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입장을 갖고 있었다. 한국왕실이 공식적으로 개신교선교를 허용하지는 않았지만 간접적으로 개신교 선교를 묵인하고 있었다는 흔적을 찾아볼수 있다. 이런 요인들은 한국의 복음수용과 확장을 가져오는 요인이 되었다는 점이다.
한국선교는 개항과 함께 시작하였다. 일본은 강화도 조약을 체결하여 조선의 개항을 이루어냈다. 미국과의 수교도 이홍장과 슈펠트 사이에서 1882년 5월 제물포 해안에 마련된 장막에서 조미수호통상 조약이 체결되었다. 미국과의 조약은 지극히 정치적인 사건이었으나 이것이 미국과의 수교뿐만 아니라 선교관계를 수립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것을 계기로 견미사절단이 파견되었고 견미사절단은 가우쳐 목사를 만나 한국선교를 타진하기에 이르렸다.
감리교에서는 가우쳐와 매클레이가 장로교에서는 엘린우드가 조선선교를 준비하였고 만주에서는 존로스와 매킨타이어 선교사가 조선선교를 백방으로 모색하였다. 이들 뿐만 아니라 일본주재 조지낙스 선교사와 중국에서 활동하던 길버트 리드 선교사도 조선 선교의 즉각적인 점유를 선교본분에 촉구하는 서한을 보내 조선선교를 공식적으로 요청하고 나섰다. 특히 일본에서 활동하던 조지낙스 선교사는 조선선교에 장을 여는데 중요한 공헌을 하였다. 이런 일련의 노력으로 장로교 선교사 알렌과 언더우드가 입국하였고 감리교 선교사 아펜젤러와 스크랜톤의 입국이 이루어졌다.
5. 각국 선교사들의 입국 :
미장로교와 감리교에서 교단적인 차원에서 한국선교를 위한 계획이 추진되고 있는 동안 중국에서 활동하던 북장로교 파송 의료 선교사 알렌이 전혀 예기치 않게 한국으로 선교방향을 돌렸다. 알렌은 갑신정변 때 치명적인 상처를 입은 민영익을 치료하였고 이것을 개기로 알렌은 고종에게 재가를 얻어 정2품에 해당하는 참판 벼술까지 얻게 되었다. 알렌은 이것을 계기로 광혜원이라는 병원을 설립하는 기회를 마련하였다. 광혜원이 제중원으로 개명되고 왕실과의 유대도 더욱 강화되었다. 광혜원은 자연스럽게 한국개신교 선교의 거점이 되어 선교의 효과를 극대화 시킬수 있었다.
알렌 이후 개신교를 대표할 만한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입국하였다. 한국에 도착한 언더우드는 한국어를 배우는데 심혈을 기울였고, 동시에 마기복음의 번역과 사전편찬을 착수했다. 경신학교의 전신인 존 디 웰즈 학교를 설립해 인재양성에 심혈을 기울였다. 1887년 아펜젤러와 함께 상임성서번역위원회을 발족해 성경번역을 시작한 언더우드는 성경번역에 혼신의 노력을 기울여 1910년에 신구약 번역을 끝내고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개정작업에 물두하다 그만 건강을 잃고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언더우드는 개신교 최초의 세례를 베푼 인물이며 남장로교 선교회와 카나다 선교회의 대 한국선교의 문을 열어준 인물이며, 연합선교의 이상을 통해 한국선교를 성공적으로 이끄는데 중추적인 역할을 했던 한국선교의 개척자였다.
언더우드와 함께 아펜젤러는 한국선교에 초석을 놓는 금세기 최고의 선교사였다. 이둘은 신앙도 유사했다. 복음에 대한 열정,남을 먼저 생각하는 이타적인 사랑, 한국선교에 대한 비젼에서 어느 누구와도 견줄수 없는 놀라운 공헌을 했다. 1902년 목포로 가는 작은배를 타고 가다 난파되어 세상을 떠나기까지 한국선교에 헌신했던 사람이다.
한국의 이들을 통해 시작되었고 1898년까지 한국에서 북장로교, 남장로교, 호주장로교, 카나다 장로교등 네 개의 장로교 선교회가 입국해 한국 장로교 선교를 가속화시켰다. 한국에 입국한 네 개의 선교회는 1893년에 결성된 장로교공의회의 구성원이 되어 교단별로 한국 선교를 추진하기보다 범장로교 연합을 통해 선교의 효율을 증대시켜 나갔다. 또한 빅토리아 선교회, 미 감리교 선교단, 남 감리교 선교단. 러시아 선교회, 동아기독교, 동양선교회, 안식교 선교회, 플리머스 형제단, 등이 차례로 한국선교를 시작함으로써 1910년까지 다양한 개신교 선교사들이 한국에 입국하였다.
우리의 한국선교와 관련하여 다음 몇가지 사실을 발견할수 있다. 첫째, 거의 같은 시기에 다양한 선교회가 동시에 입국하여 한국개신교 선교를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둘째, 장로교 네 개의 선교회가 감리교는 두 개의 선교회가 거의 같은 시기에 입국함으로써 장.감 선교회가 거의 한국개신교 선교를 주도했다는 사실이다. 또한 이들의 연합은 선교지의 난관을 극복하고 상당한 선교의 결실을 거둘 수 있었다.
6. 하나님 호칭논쟁 :
처음 전래되고 성경이 번역될 당시, 19세기 말과 20세기초에는 천주냐 ,여호와냐 ,하나님이냐 아니면 하느님이냐를 놓고 선교사들 간에 적지 않은 마찰과 갈등과 논란이 있었다 예를 들어 언더우드와 기포드 선교사는 유일신 여호와 하나님을 천주로 호칭해야 한다고 주장한 반면 게일과 마펫 선교사는 하나님으로 호칭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하나님 호칭논쟁은 우리말에서 유일신 하나님을 나타내는 적절한 단어를 고르는데 어려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영어에서는 여러신들을 여러 신들을 의미하는 신(god)과 대비되는 유일신 하나님(GOD)의 명칭이 있으나 대개 비슷한 한자를 쓰고 있는 중국, 한국, 일본에서는 일반적인 자연신들을 뜻하는 여러 잡신들과 구별되는 유일신을 뜻하는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적절한 호칭이 없었던 것이다. 때문에 이 호칭 문제를 놓고 선교사들사에는 세가지 의견들이 있었다.
첫째, 하늘의 으뜸신이 이름을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이름으로 사용하되, 성경에서 말하는 여호와 하나님을 한국 사람들이 통념적으로 경배하는 신과 구별하여 유일신의 성격과 특징을 가르치는 것이 좋을 것이라는 견해이다. 둘째 상위 신 신개면이라 하더라도 이교도들이 갖고 있는 신 명칭을 빌어 인격적이고 영원한 여호와 하나님의 호칭으로 사용해서는 안되며 결국 그것은 기독교의 본래정신이나 성경의 유일신 개념과도 어긋나기 때문에 도저히 신앙 양심으로 허용할 수 없다는 의견이다. 셋째는 상당수의 선교사들로부터 지지를 받는 견해로 여호와를 뜻하는 이름으로 하다님을 사용하자는 주장이다.
선교사 언더우드는 비록 하나님이라는 용어가 언더우드 당시 한국인들이 갖고 있는 상위 신개념인 하늘+님의 의미이지만 그 개념 속에는 유일신의 개념도 담겨있기 때문에 기독교 유일신을 가리키는 호칭으로 사용하여 바로 가르치면 별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7. 한국교회의 조상숭배 문제 :
조상숭배는 보편적인 인간의 관습이었다. 그러나 특히 동양 ,특히 중국과 한국에서 조상숭배는 단순히 조상에 대한 효를 표하는 예식의 수준을 넘어 종교적인 성격이 강하게 띠게 되었다. 따라서 유일신아에 기초한 기독교가 조선에 전래되는 과정에서 가장 큰 어려움과 논란의 대상이 바로 조상제사문제였다.
천주교의 입장은 마태오 리치의 입장에서와 같이 신앙과 대립되는 것으로 보기보다는 조화되는 것으로 이해했다. 그의 선교방법은 문화위의 복음의 2층 집을 짓자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중국의 제사제도를 인정하는 적응식 선교방법을 채택하였다. 그러나 교황 클레멘트 11세가 1715년과 1742년 두차례에 걸쳐 유교적 조상숭배는 성경의 교훈에 어긋나기 때문에 카톨릭교회에서는 용납 할 수 없다며 조상숭배에 대한 금지령을 내렸다.
1791년 한국에서는 신유박해가 일어났고 천주교신자들은 천주교의 가르침에 따라 조상제사를 철저하게 거부하여 무려 10000명의 순교자를 냈다. 그러나 이런 입장도 선교 한세기 반 만에 1939년 조상숭배를 허용하였다. 2차세계대전을 치르면서 일본과 이탈리아와 동맹을 맺으면서 정치적인 이류로 신사참배와 제사문제를 허락한 것이다.
개신교의 입장은 선교초기부터 현재까지 조상숭배에 대해 반대적인 입장을 취하였다. 개신교 선교사들은 천주교와 마찬가지로 정면돌파 작전을 취했다. 중국에서 중국 중앙선교 협의회가 조상숭배와 기독교와의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조상숭배 대신 추도식으로 대치하기로 합의를 보면서 이것이 자연스럽게 한국 개신교에 영향을 주어 오늘날 추도식으로 정착되었다. 제사를 죽은 부모에 대한 단순한 효정으로 볼것이냐 아니면 죽은 영혼을 신격화하는 종교적인 것이냐가 선교초기부터 제기되어 왔던 문제의 핵심이고, 지금도 제사자체를 어떻게 볼것이냐 하는 것이 판단의 중요한 관건이다.
기독교는 제사는 조상숭배를 근간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바알신을 금지하는 기독교의 유일신 신앙에서 볼 때 도저히 용납할수 없는 문제이다. 그러나 천주교에서는 연옥설을 믿기 때문에 죽은자를 위한 기도나 미사를 허용한다. 기도와 미사를 통해 죽은 부모나 조상을 연옥에서 해방시킬수 있다고 보기 때문에 죽은자나 조상을 위한 미사를 제도화시키고 있다.
8. 영아소동사건 :
1888년 개신교 선교 초에 발생한 소위 영아소동이다. 개신교 선교가 시작된지 불과 4년 밖에 되지 않았던 그해 항간에는 외국 선교사들이 한국의 유아들을 유괴해 잡아 먹는다는 소문이 나돌아 드디어는 폭동으로 발전하였던 것이다.
영아 소동의 배경은 1888년 4월 갑자기 천주교에 대한 금교령이 내려진것과 연관이 있다. 금교령은 천주교에 내려졌지만 개신교 단체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전도금지령이 내리게 된 직접적인 원인은 표면화되지 않았으나 천주교가 건축을 하는 과정에서 조정의 비위를 건드렸기 때문으로 해석된다. 1888년 5월부터 9월까지 아침예배, 주일예배에 대한 일체의 종교활동이 금지 되었고 지방에서는 기독교 문헌들이 불태워지기도 하였다.
조선정부만 아니라 당시 일반 백성들에게도 여러모로 선교사들에 대한 온갖 루머가 난무하고 있었다. 외국인들이 한국인 악질분자를 돈으로 매수하고는 아이들을 꾀어다가 잡아먹고, 눈알을 빼서는 약용이나 사진현상재료로 사용한다는 음흉한 소문이 항간에 나돌았다. 이 때문에 선교사와 상종하던 관원까지 9명이나 처형받은 일이 있었다.
영아소동은 선교사들에게 직접적인 피해는 없었다. 그러나 정부에서는 영아소동이 국가 질서를 어지럽히고 근거없는 소문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고는 진화에 나셨다. 이 사건은 당시 왕실과 가까운 선교사들은 영아소동이 민비를 획책하는 적들이 고의로 일으킨 사건으로 분석하고 있었다. 고종과 민비는 외국인들에게 우호적이어서 궁궐에서 열리는 연회나 식사에 초청하는 등 여러 가지 면에서 선교사들에게 호의를 베풀었다. 대원군을 위시한 위정척사파가들이 서민들을 선동해 민비와 그 가족을 파멸시키려는 음모였던 것이다.
금교령과 영아소동은 한국선교에 새로운 장을 여는 계기가 되었다. 첫째 정부가 갖고 있던 편견이 해소되어 두 사건은 오히려 개신교 선교사들과 밀접한 관계를 맺게 만들어 주었다는 사실이다. 둘째는 정부뿐만 아니라 민중과의 관계도 더욱 밀접해지는 계기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처음부터 선교사업에 냉소적이던 한국인들은 이제 전적으로 선교사들을 믿기 시작하였다.
9. 하나의 조선교회 설립논쟁 :
을사보호조약을 통해 한국의 국권을 유린 당하는 엄청난 치욕을 겪던 1905년 , 장로교와 감리교가 교파를 초월하여 하나의 기독교회를 선교지 한국에 설립하려는 움직임이 제기 되었다.
북감리교와 남감리교가 한국선교를 시작하면서 장로교 공의회와 감리교 선교회는 교계예양이라는 선교지 분할협정을 맺는등 장로교선교회와 감리교 선교회는 연합적으로 한국선교를 위해 노력하였다
장감연합공의회는 선교사역을 상호협력하고 궁극적으로 한국에 하나의 복음주의 민족교회를 설립하는 목적으로 세워졌다. 장감연합선교회는 하나의 민족교회를 설립하려는 이상을 가지고 선교부에 의견을 타진했다. 그러나 선교부는 신학적인 이유와 교단적인 입장, 칼빈주의 체계에 어떻게 알미니안주의의 감리교가 하나의 독립된 교단을 한국에 설립할 수 있겠는가의 문제에 부딪쳐 무산되고 말았다. 그러나 장감연합선교회는 성서번역, 기독교교육, 문서선교, 의료선교등 여러면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였다. 평양숭실대학을 공동으로 운영하였고, 세브란스와 연희전문학교를 공동으로 설립해 운영했다. 코리아 미션필드를 발간하고 연합찬송가를 발간하였다. 그리스도 신문을 발간하였고, 주일학교 공과도 공동으로 만들었다. 이들의 연합의 중심에서는 언더우드가 지대한 역할을 하였다.
10. 개신교 선교정책 :
한국의 개신교에 대한 놀라운 결실은 그들이 사용한 선교정책과 무관하지 않는다는 것이 일치된 견해이다. 대체로 초기 선교사들이 사용했던 선교정책은 의료 및 교육선교, 성경번역, 연합사업, 그리고 선교지 분할정책으로 대별할수 있을 것 같다.
한국에 파송된 개신교 선교사들이 사용한 선교정책 중에 하나는 의료선교였다. 의료선교 뿐만 아니라 교육을 통한 선교에 선교사들은 지대한 관심을 가졌다. 배재학당, 이화학당, 고아원 설립과 여러학교를 설립하여 서양교육을 시작하였다 . 성서번역은 중국과 일본, 국내선교사들에 의해서 진행되었다. 한글 성서번역이 한글 문화에 끼친 영향은 지대하다. 한글성경은 한글을 대중화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한국선교가 처음 크게 성공한 이유 가운데 하나는 그들이 독립적으로 활동하지 않고 연합하여 활동했다는 점이다. 연합운동이 가능하게 된 것은 언더우드의 역할이었다.
선교지 분할 협정은 지방색을 나타내는 단점을 드러냈으나, 선교의 효율성을 높이는 역할을 하였다. 협정의 중심내용은 첫째, 5천명 이상의 도시는 공동으로 선교하고, 둘째는 5천명 미만의 도시는 이미 선교를 시작한 선교단체가 기득권을 가지며 6개월 동안 공석일 때는 타 선교회가 선교를 시작해도 좋다. 셋째, 가능하면 선교가 시작되지 않는 지역에 선교를 착수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며 넷째, 감리교나 장로교나 서로 다른 교회를 존중하며, 다섯째 다른 선교지역으로 교인들이 이동할 경우 자유의사대로 이동하되 반드시 목사의 추천서를 받는다. 여섯째 조사들에 대해서는 선교회가 직접적으로 보조금을 지불하지 말 것, 그리고 일곱 번째는 모든 문서의 규격은 통일한다는 내용이었다. 교계예양을 체결한 후 감리교에서는 우리가 그 입장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천명하기는 했지만 , 한국의 선교지 분할 협정은 공식화되기 시작했다.
한국교회의 복음수용과 확장의 과정에서 우리는 다음 몇가지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첫째, 한국선교는 다양한 선교단체가 거의 동시에 한국선교를 시작했다는 것이다. 둘째, 천주교와 개신교는 선교방법이 근본적으로 달랐다는 사실이다. 셋째, 우리가 이해하기 힘들 정도로 한국교회는 한국인 스스로에 의해 복음이 전해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넷째, 한국선교의 과정에서는 일련의 사건들이 아다리가 딱 맞아 떨어지는 경우는 너무도 많이 발견된다. 하나님의 섭리의 개입 이것은 우리가 마지막으로 지적하지 않을수 없다.
11. 선교사들의 사상과 삶 :
한국에 파송된 선교사들은 한국인과 한국교회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들이 과연 무슨 신학사상을 가지고 있었는가를 우리가 바로 조명해야 할 필요가 있다.
사무엘 마펫과 마포삼열과 소안론 곽안련은 맥코믹 출신의 선교사들이다. 특히 소안론 선교사는 성경통신 강좌를 최초로 한국에서 시작하여 성서연구를 저변화시키는데 큰 공헌을 세웠다. 그는 음악적인 재능에도 뛰어나 몇편의 찬송가를 저술하기도 했다. 신학적인 면에서도 보수적인 선교사였다. 관안련 선교사는 그의 시카고 대학 논문인 네비우스 선교정책은 해외 선교연구의 하나의 모델로 평가받은 작품이다. 표준성경을 비롯 성경주석, 평양신학교 교재, 그리고 신학지남에 남긴 주옥같은 여러편의 논문들은 한국의 보수주의 신학의 맥을 형성하는 초석이 되었다.
유니온 신학교 출신 중 한국선교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사람은 레이놀즈와 크레인 선교사이다. 레이놀즈는 남장로교 선교의 개척자였고 남장로교 헌법을 번역해서 한국에 소개해 장로교 정치의 틀을 잡아주었으며, 성서번역과 신학교육을 통해서 한국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뿐만 아니라 평양신학교의 최초의 조직신학 교수로 수십년을 봉사하면서 한국의 신학적 틀을 세우는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던 인물이다. 크레인 선교사는 레이놀즈와 신학적인 보수성에서 맥을 같이한다. 한국최초로 무천년서을 가르쳤던 사람이며 무천년을 가르치며 역사적 전천년설이나 후천년설이나 개혁주의에서 다 포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일찍부터 외친 사람이다.
프린스톤 출신들 중 한국선교에 영향을 미친 사람은 로버트, 어드만 ,헤밀톤 선교사이다. 라부열로 알려진 로버트 선교사는 1925년 평양신학교 교장에 올랐다. 상당히 보수적인 성경관을 가진 사람이었다. 어드만 선교사와 헤밀톤 선교사는 성경의 초자연적인 면, 성경이 구원이라는 측면 뿐만 아니라 역사 과학 지리 모든면에서 성경은 오류가 없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철저히 변호한 사람이었다.
우리가 간과해야 할 사실은 처음 50년간은 맥코믹 출신 선교사들이 한국장로교 신학을 주도하였다는 점이다. 또 한가지 지적하고 싶은 것은 이처럼 보수적인 선교사들이 지배적이었지만 진보적인 선교사들도 처음부터 한국선교지에 와 있었다는 사실이다.